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지난 4월 한국 극장에서 먼저 관객을 만났다. 북미 개봉일인 5월1일보다 이틀 빠른 일정이었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까지 서울을 찾아 작품을 알렸다. 20년 만에 돌아온 할리우드 기대작이 본고장보다 먼저 한국의 평가대에 오른 것이다.
한국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먼저 만나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글래디에이터2는 2024년 11월 한국에서 개봉했다. 북미 개봉일인 같은 달 22일보다 9일 앞섰다. 위키드: 포 굿도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먼저 공개된 뒤 21일 북미 관객과 만났다. 두 작품 모두 국내 배급 과정에서 ‘전 세계 최초 개봉’을 앞세웠다.
한국 선개봉 전략의 바탕에는 코로나19 이전까지 성장한 극장시장이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당시 국내 극장 관객 수는 2억2668만명, 매출액은 1조9140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 극장시장은 세계 4위 규모였고, 인구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4.37회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절대 인구는 북미나 중국보다 적지만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과 전국적인 멀티플렉스망을 갖춘 시장이었다.
한국을 글로벌 1차 개봉국에 포함하는 전략은 마블 작품에서도 반복됐다. 아이언맨3(2013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년),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년)이 그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2022년) 역시 최초 개봉을 홍보했다.
한국이 할리우드 본고장보다 먼저 영화를 트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개봉 요일의 차이다. 국내 극장가는 오랫동안 수요일 개봉을 관행으로 유지해왔다. 북미 영화시장은 통상 금요일을 개봉일로 잡는다. 동일한 주에 세계 동시 개봉을 추진해도 한국에서는 수요일, 북미에서는 금요일에 상영을 시작하면서 이틀의 차이가 생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와 위키드: 포 굿이 이에 해당한다.
국내 개봉일이 수요일로 앞당겨진 데는 주말 관객을 확보하려는 계산이 작용했다. 과거 토요일이었던 영화 개봉일은 주5일제 확대와 관람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금요일과 목요일을 거쳐 수요일까지 당겨졌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확보한 관객 수와 반응을 토대로 주말 상영 규모와 마케팅 전략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라는 홍보 효과를 선점하려는 경쟁도 개봉일을 앞당긴 배경으로 꼽힌다.
한국의 박스오피스 데이터도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한다. 영진위가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은 전국 영화관의 발권 정보를 온라인으로 실시간 집계한다. 관객 수와 매출액, 스크린 수와 상영 횟수뿐 아니라 실시간 예매율도 확인할 수 있다. 실시간 예매율은 조회 시점을 기준으로 상영 시작 2시간 이후의 특정 영화 예매 관객 수를 전체 예매 관객 수로 나눠 산출한다. 개봉 전 관심도부터 첫날 성적까지 빠르게 수치로 드러난다.
관객 반응도 주말 전에 형성된다. 수요일에 영화를 본 관객이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에 평가와 영상을 올리면 입소문이 확산한다. 세계 최초라는 표현 자체도 작품을 먼저 본다는 경험을 제공해 개봉 초기의 관심을 높이는 홍보 수단이 된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개봉 전 예매율과 개봉 후 박스오피스 순위가 추가 광고를 집행할 때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한국의 초기 반응이 전 세계 흥행을 보장하는 보증수표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화 바비(2023)다. 연출을 맡은 그레타 거윅 감독과 주연 마고 로비 등이 한국을 찾아 대대적인 핑크카펫 행사를 열며 공을 들였지만 국내 누적 관객 수는 58만 명에 그쳤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는 14억 달러(약 1조 8000억 원) 이상의 대박을 터뜨렸다. 같은 해 내한한 톰 크루즈의 노력에도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은 최종 관객 수 402만명으로 기대에는 못 미치는 수치였다. 한국과 전 세계 관객의 온도 차가 극명했던 셈이다.
결국 한국에서 먼저 영화를 트는 이유는 성공이 확실해서가 아니다. 수요일 개봉과 촘촘한 발권 시스템, 빠른 입소문을 통해 작품의 초기 반응을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흥행의 정답지가 아니라 할리우드 대작의 첫 성적표가 나오는 주요 개봉시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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