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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쇼비즈워치] 홍콩 시위 ‘절반의 성공’… 문화사업도 도약할까

입력 : 2019-06-16 16:29:34 수정 : 2019-06-16 16: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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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문제가 된 중국당국과의 ‘범죄인 인도 법안’ 추진을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후퇴선언 원인은 역시 어마어마한 홍콩시민들의 저항 열기라 봐야한다. 지난 9일 홍콩시민 103만여 명이 참여한 반대시위가 열렸다. 홍콩 전체인구의 1/7이 참여한 시위다. 중국의 홍콩 사법독립성 침해 가능성에 그 정도로 민감히 반응한 것이다. 지난 2014년 행정장관 완전직선제를 요구했던 ‘우산혁명’ 실패의 한(限)도 이번 저항열기 지렛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같은 성과도 결국은 ‘절반의 성과’가 맞다. ‘범죄인 인도 법안’은 폐기가 아니라 추진 ‘연기’됐을 뿐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번 연기 선언은 홍콩시민들이 중국당국 억압으로부터 싸워 얻어낸 첫 번째 승리가 된다. 그 성취감과 자신감이 향후 많은 상황을 바꿔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절반의 승리’ 혹은 ‘첫 번째 승리’는 홍콩대중문화산업, 특히 한때나마 아시아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홍콩영화산업의 새로운 미래도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애초 홍콩이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문화적 자유’의 확보였고, 홍콩대중문화산업이 패망의 길을 걸은 것도 상당부분 이 ‘문화적 자유’가 흔들리며 벌어진 일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애초 홍콩이 1970~90년대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꽤나 간명하다. 드넓은 범중화권에서 온갖 문화계 인재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내내 중국 공산화와 중화민국(대만) 성립 등 중화권 전체가 폭풍에 휘말린 뒤, 중국과 대만은 동시에 문화억압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중국 모택동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의 장개석 역시 체제경쟁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현실비판을 금지하는 노선을 취했다. 그러자 중국과 대만 양쪽에서 문화 인력들이 홍콩으로 넘어와 집결하는 흐름을 낳았다. 영국령으로서 서구식 문화적 자유를 누리고 있던 홍콩은 그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따른 갈등도 존재했다. 1950~60년대 내내 홍콩대중문화시장에선 기존 광동어 콘텐츠와 새롭게 상륙한 인력들의 만다린(표준중국어) 콘텐츠가 옥신각신하며 경쟁하는 구도가 연출됐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로 간 ‘홍콩만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광동어 콘텐츠로 통일되는 흐름을 낳았다. 이소룡의 쿵푸영화와 허관문의 코미디영화들이 광동어 영화 대세 구도를 이끌고, ‘칸토팝’이라 불리는 광동어 팝(이전까진 만다린 팝이 주류였다)이 대중음악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광동어 방송사 TVB가 홍콩대중문화산업 각 분야 인력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하면서 비로소 독특한 ‘홍콩문화’ 노선이 성립됐다.

 

1980년대 홍콩대중문화, 특히 홍콩영화 신화는 바로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탄생된 것이다. 일본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화통하게 열린 문화적 자유를 토대로, 양질의 인력 집결, 그리고 비로소 자신들 정체성을 정립한 탄탄한 마인드 베이스가 만나 일어난 대폭발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홍콩대중문화 쇠퇴도 설명될 수 있다. 1997년 홍콩반환이 코앞으로 닥치며 홍콩대중문화산업은 가장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영화산업부터 골머리를 썩기 시작한다. 향후 어찌될지 모른단 불안감에 투자가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범죄조직 삼합회가 치고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삼합회는 애초 대중문화산업을 장기적 안목으로 이끌 생각이 없었다. 반환 불안감을 지닌 건 삼합회도 마찬가지였고, 어떤 의미에선 더 극심했다 볼 수 있다. 그러니 잠깐 동안 ‘치고 빠질’ 요량으로 졸속 속편 등등 저급 프로덕션으로 일관했다. 나중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바로 앞에서 해당영화 불법복제CD를 파는 기행까지 벌였다. 산업기반은 금세 초토화됐다. 이러니 성룡, 주윤발, 이연걸 등 스타배우들과 오우삼, 서극, 임영동 등 스타감독들까지 모조리 할리우드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산업을 지탱하던 스타들이 모두 빠져나가 공동현상이 일어나니 시장은 더더욱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물론 그래도 ‘반짝’하던 땐 있었다. 중국본토까지 확장된 시장을 바탕으로 남은 영화인들이 보다 큰 자본을 쥐고 승승장구하던 2000년대 초반이다. ‘무간도’ 3부작과 ‘소림축구’ ‘쿵푸허슬’ 등 주성치 블록버스터들, 두기봉 범죄영화들이 이때 등장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시장에 의존한다는 건 곧 중국당국에 통제받는단 의미도 됐다.

 

중국시장 입성 ‘허가’를 미끼로 각종 규제와 검열은 점차 심해지고, 2003년엔 홍콩기본법 23조 통과 문제까지 벌어졌다. “홍콩특별행정구는 국가분열과 반역, 국가기밀을 훔치는 등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문구를 통해 법적으로 중국정부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 같은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노선’만큼은 꾸준히 확대일로를 밟았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려는 영화계 움직임도 서서히 일어났다.

 

가장 먼저, 각종 탄압을 받아온 본토 반체제 영화감독 로우예 등을 반면교사 삼아 주로 연애영화를 통해 홍콩 정체성 문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 3부작의 팡호청이 한 예다. ‘교감’으로 주목받은 맥희인도 이에 가담했다. 그 맥희인 각본으로 홍콩 서민 인정극 전통을 부활시킨 종주가의 ‘아이 러브 홍콩’도 있다. 반환과 맞물려 캐나다와 미국 등으로 ‘도피’했던 홍콩인들이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재개발로부터 전통재래시장을 지켜내려는 노력을 그린 영화다. 궁극적으로 홍콩의 기존 ‘정체성’을 지키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다 2014년 ‘우산혁명’ 운동이 일어나고, 마침내 이 같은 ‘은유적 사회파 영화’ 시대도 종지부를 찍는다. ‘우산혁명’ 열기를 자양분 삼아 2015년 공개된 저예산 옴니버스영화 ‘10년’이 홍콩시민들의 엄청난 호응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부터다. 10년 뒤인 2025년을 배경으로, 홍콩 정체성이 사라지고 본토의 통제가 강화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노골적 풍자영화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 홍콩 최고 권위 금상장영화제가 작품상을 수여하면서 지지를 표명한다. 이제 ‘대놓고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103만 시위’까지 왔다. 언급했듯, 절반은 성공한 시위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홍콩영화산업 역시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하려 스스로 포기했던 문화적 자유를 되찾기 위해 향후 더욱 민감히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유를 방어할 수 있게 됐을 때, 수 십 년간 축적된 기존 노하우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홍콩영화산업은 어마어마한 도약을 이뤄낼지 모른다. 한류는 그렇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결국 문화시장경쟁이란 여러 의미에서 ‘문화적 자유의 경쟁’이라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그 다음 홍콩이, 그리고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동시에 중국이 그 거대한 시장과 자본력을 쥐고서도 아직까지 문화강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등 홍콩대중문화산업의 부활과 함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아시아 대중문화의 보다 흥미로운 미래구도를 기대한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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