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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66. 악천후에도 길 떠나는 나그네

입력 : 2017-12-26 18:41:00 수정 : 2017-12-26 1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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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일 년 중 가장 음의 기운이 강한 날이다. 그래서 그날 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구명시식에 참여를 한다. 지난 주 너무 많은 분들이 자리를 해서 대학로 넓은 선원이 비좁게 느껴졌다.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지만 자리를 꽉 메운 사람들을 보면 기운이 난다. 일심으로 기원을 했으니 바람 하나는 이룰 것이다. 요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은 지인들이 나에게 구명시식을 줄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한다. 나를 걱정해주니 고맙게 생각한다. 물론 힘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일이 남을 구하고 때로는 나를 살린 것을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다.

서울의 모 종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의 일이다. 20대 초반에 심한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 인생의 고비를 겪어야 했기에 매사 조심한다 해도 무리하다 보면 가끔씩 폐에 염증이 재발하곤 한다. 그날도 폐에 염증이 심하게 재발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폐의 염증 정도와 피의 순환을 알기 위해 핵의학 검사를 받는 날, 나는 왼쪽 팔에 큰 링거를 맞으며 검사용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몸의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캡슐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이내 몽롱해지면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하얀 국화 밭에서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듯 기분이 좋아지며 국화 밭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얼마 전 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지인이 나타나 “법사님! 빨리 일어나세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분명 영가의 모습이었다. 축축하다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링거액이 샜나?’라는 생각에 바닥을 만져보니 캡슐 전체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링거 주사바늘이 빠지면서 계속 피가 흘렀고 이내 기분이 좋아져 절로 눈이 감긴 것이다. 국화 밭을 헤매는 꿈이 죽음으로 향하는 단계일 줄이야. 놀란 나는 캡슐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워낙 캡슐 벽이 두꺼워 소리를 듣지 못하고 검사는 계속 진행됐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해 있는 힘껏 캡슐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고 마침내 캡슐이 열리자 의사들은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대로 계속 있었다면 과다출혈로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가가 꿈에 나타나 나를 깨우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사태가 진정되자 병원사람들은 서로 책임 미루기에 급급했다. 환자의 목숨보다 의료사고로 인한 책임에 안달하는 모습을 보고 그 날로 병원에서 퇴원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었다. 언론계 지인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을 하였다. 구명시식 날이 잡히면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지만 나를 형제처럼 생각하는 지인의 마음을 생각하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문을 다녀왔는데 결국 구명시식을 하는 도중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최대한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숨이 탁 막히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영계의 도움인지 그날 구명시식 참관자 중에 의사가 있어 급하게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지만 답답한 나의 운명에 가슴이 아팠다.

일본 전국시대에 육효점을 매우 잘 치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매일 육효점으로 그날의 운세를 보곤 하셨는데 하루는 먼 길을 떠나시는데도 점을 치지 않아 제자들이 물었다. “오늘은 왜 점을 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결연한 표정으로 “설사 불길한 괘가 나와도 나는 가야 한다.” 그렇게 길을 떠난 스님은 자객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영계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뒤 구명시식은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 됐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 않으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지만 소명이요, 해야 할 숙명으로 알고 악천후에도 길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묵묵히 그 길을 가려한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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